들어가며
해외 유명 쇼핑몰이나 매장에 가 보면 ‘Buy Now, Pay Later(지금 사고, 나중에 지불)’라는 문구를 종종 볼 수 있다.
상품을 먼저 구매하고 결제 금액은 이후 여러 번에 걸쳐 나눠 내도록 해주는 BNPL(Buy Now, Pay Later) 서비스는 코로나19 시기에 온라인 쇼핑이 급성장하면서 젊은 소비자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온라인에서 출발한 BNPL은, 이제 오프라인 결제 시장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2024년 4월, 삼성전자도 자사 삼성월렛(Samsung Wallet)에 BNPL 기능을 도입할 것을 선언하며 온·오프라인을 아우르는 할부 결제 실험에 나섰다. 왜 삼성은 BNPL을 선택했을까? 그리고 구글을 비롯한 다른 빅테크들은 어떤 전략으로 이 시장에 뛰어들고 있을까? 오늘은 이에 대해 짚어보려 한다.
삼성월렛은 왜 BNPL을 도입했을까
삼성전자가 삼성월렛에 BNPL 기능을 추가한 가장 큰 이유는 간편결제 시장에서의 경쟁력 강화다. 삼성월렛은 스마트폰을 활용한 디지털 지갑 서비스로, 기존에는 신용카드 결제나 멤버십 관리 등에 초점을 맞춰왔다. 그런데 최근 애플이 애플페이 레이터(Apple Pay Later)로 자사 페이 서비스에 BNPL을 도입하고, 구글페이나 페이팔 등도 잇따라 BNPL 옵션을 확충하면서 삼성도 발 빠르게 대응에 나선 것이다.
업계에서는 거대 커머스·결제 플랫폼들이 BNPL을 자체 생태계에 흡수하려는 배경에 대해 “BNPL 서비스를 통해 B2C뿐 아니라 B2B 영역까지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소비자들이 자사 월렛 하나로 다양한 결제 방식을 선택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탈을 막고 사용성을 높이려는 전략인 셈이다.
삼성월렛의 BNPL 도입은 특히 “오프라인 할부 경험”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기존의 BNPL 서비스는 주로 온라인 쇼핑 결제 단계에서 활용되어 왔지만, 삼성은 스마트폰 터치 한 번으로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할부 구매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삼성전자 미국법인은 2024년 4월부터 일부 주(州)에서 삼성월렛을 통한 인스토어(in-store) BNPL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올 연말까지 미국 전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 서비스는 Splitit이라는 핀테크 업체와의 제휴로 구체화되었다. 추가 신용조회나 별도 계정 생성 없이 사용자가 가진 기존 신용카드 한도 내에서 할부를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삼성월렛에 등록된 비자나 마스터카드 신용카드를 선택하고 “분할 결제(Pay in installments)” 옵션을 누르면, 6주 간격으로 6회 납부부터 최대 9개월 간 매월 납부까지 총 4가지 할부 플랜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결제가 완료되면 향후 남은 분할 납부 일정과 금액을 월렛 앱에서 손쉽게 관리할 수 있으며, 별도로 이자나 수수료가 부과되지 않는다. 신용카드의 무이자 할부 기능을 플랫폼 차원에서 간편하게 꺼내 쓸 수 있도록 해 “BNPL의 중개자(Middleman)를 없앤” 사례라는 평가도 나온다.
삼성월렛 BNPL의 도입 배경에는 사용자 편의성과 충성도 제고라는 목적도 깔려 있다.
삼성 측은 스마트폰 월렛 하나로 신분증, 티켓, 디지털 키, 결제까지 모두 처리하는 올인원 생활 플랫폼을 지향하고 있으며, BNPL 기능 역시 이러한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된다. 이미 2022년 삼성전자 스페인법인이 스웨덴의 BNPL 업체 클라르나(Klarna)와 제휴해 삼성 온라인 스토어에 3개월 무이자 후불결제를 도입한 바 있는데, 이는 디지털 판매 채널의 수익성을 끌어올리고 고객 편의성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삼성은 이처럼 해외 시장에서 축적한 BNPL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글로벌 삼성월렛 경쟁력 강화와 사용자 락인(lock-in)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글 월렛의 BNPL 도입 현황
구글 역시 자사 구글 월렛(Google Wallet)과 구글 페이(Google Pay) 서비스를 통해 BNPL을 활용하고 있다. 다만 삼성과 달리 직접 할부 금융을 제공하기보다는 외부 핀테크 파트너들과 연동에 초점을 맞추는 모습이다.
구글은 2024년 초부터 미국 사용자를 대상으로 어펌(Affirm)과 집(Zip) 등의 BNPL 업체 서비스를 구글 페이 결제 옵션으로 통합하는 파일럿을 시작했다. 온라인 쇼핑몰이나 앱에서 결제할 때 구글 페이로 결제를 선택하면, 신용카드 외에 할부 결제 옵션이 표시되는 식이다. 사용자는 원하는 BNPL 제공업체를 선택해 약관 동의와 승인 절차를 거쳐 해당 업체가 제공하는 분할 결제를 이용할 수 있다. Zip을 고르면 $35 이상 구매 시 4회 분할결제(Pay in 4)로 나누어 내는 방식을, Affirm을 선택하면 해당 업체의 앱으로 연결돼 할부 기간을 더 길게 설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쉽게 말해 구글은 여러 BNPL 서비스를 자신의 지갑에 입점시켜 둔 셈이다.
구글이 이런 방식을 취한 이유는 무엇일까? 업계 전문가들은 구글이 애초에 금융기관 역할을 하기보다는 플랫폼으로서의 강점을 살린 전략을 펼치고 있다고 본다.
BNPL 옵션을 제공하면 구매 전환율이 올라가는 효과가 있어 가맹점들은 반기는 추세다. 구글은 2024년 11월 애프터페이(Afterpay)를 연동했고 2025년 클라르나(Klarna)연동을 예고하면서 다수의 BNPL 서비스를 품게 되었다. 한편으로 이는 자체 BNPL 서비스인 ‘Apple Pay Later’를 밀어붙였던 애플과의 차별점이기도 하다. 구글은 외부 파트너와의 협력을 통해 소비자 선택의 폭을 넓히는 한편, 복잡한 대출 관리나 규제 리스크를 줄이는 방향으로 BNPL 서비스를 플랫폼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치열해지는 BNPL 경쟁과 미래 전망
BNPL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경쟁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한때 BNPL은 스타트업 핀테크들의 영역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애플, 구글, 삼성 같은 빅테크부터 페이팔 같은 결제 공룡, 전통 금융사들까지 모두 뛰어든 상황이다. 실제로 아마존은 2021년 미국에서 Affirm과 제휴를 맺어 BNPL 서비스를 도입했고, 페이팔은 일본의 BNPL 기업 페이디(Paidy)를 약 3조 원에 인수했다. 잭 도시가 이끄는 미국 핀테크 기업 블록(Block, 구 스퀘어)는 호주의 BNPL 업체 애프터페이를 무려 290억 달러(약 34조 원)에 인수하며 업계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이처럼 막대한 자본 투입과 인수합병을 통해 성장해 온 글로벌 BNPL 기업들은, 최근 빅테크 월렛에 자신의 서비스를 탑재시키거나 직접 신용카드를 발행하는 등 사업 모델을 확장하고 있다. 클라르나는 미국 시장에서 데빗카드 형태의 BNPL 카드를 출시해 오프라인에서도 쓸 수 있게 했고, 자사 앱을 금융 슈퍼앱으로 진화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페이팔도 자체 ‘Pay in 4’ 서비스를 앞세워 BNPL 열풍을 주도했으며, 최근 독일 등지에서 디지털 지갑 기반의 오프라인 결제 파일럿을 시작하는 등 영역 확장에 나섰다.
이러한 경쟁의 이면에는 규제와 수익성이라는 과제도 도사리고 있다.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BNPL 서비스가 과도한 소비와 연체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각국 감독 당국은 BNPL을 전통적인 신용거래에 준하는 수준으로 관리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미국 금융당국은 BNPL 업체에도 신용카드와 동일한 소비자 보호 규정을 적용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고, 유럽연합(EU)도 BNPL을 신용계약의 한 형태로 규정하여 법의 테두리 안으로 편입시키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2023년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으로 네이버페이, 카카오페이 등 빅테크 후불결제 서비스를 제도권에 포함시키는 한편, 신용카드 수준의 건전성 규제를 적용하기로 했다. 이는 BNPL이 젊은 층의 신용대출 대체재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미리 관리하겠다는 의도다. 결국 경쟁을 떠나 지속 가능한 수익 모델을 만들고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는 것이 앞으로 BNPL 업계의 공통된 과제가 될 전망이다.
그럼에도 시장 전망은 여전히 밝다. 소비자들의 지불 유연성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BNPL 도입으로 매출 증대를 기대하는 가맹점도 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프리시던스 리서치(Precedence Research)는 2030년에는 BNPL 규모가 3조 달러를 훌쩍 넘을 것이라 전망했다. 미국의 경우 2021년 전체 소비자의 6.6%가 BNPL을 이용한 데 이어 2022년 8%, 2023년에는 9.3%로 매년 사용률이 높아지고 있다는 조사도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선불 충전식 간편결제에 익숙한 MZ세대가 이제는 신용카드 대신 후불결제를 새로운 대안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BNPL 서비스도 단순 단기 할부에서 나아가 중장기 금융상품으로 진화하거나, 저축 연계형(Save Now Buy Later) 등 새로운 모델이 등장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마치며 : 글로벌 상호운용성 시대의 의미
“지금 사고, 나중에 지불하세요.” 한때 할부나 외상 거래의 대명사였던 이 문구는 이제 디지털 시대의 혁신적인 결제 서비스 슬로건이 되었다.
삼성월렛의 BNPL 도입은 온·오프라인을 통합한 결제 경험 혁신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소비자는 필요에 따라 결제 시점을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고, 기업은 이러한 편의 기능을 통해 새로운 고객을 끌어들이거나 매출을 높일 수 있다.
물론 과도한 빚을 내지 않도록 하는 안전한 사용과 그에 대한 제도적 장치가 함께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BNPL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현대 소비 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새로운 결제 트렌드에 발맞춰 삼성과 구글이 시작한 이 BNPL 실험이 향후 금융·유통 생태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