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최근 몇 년간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 지갑(digital wallet)의 사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실제로 11개 주요국 소비자 조사에서 모바일 월렛이 전체 디지털 거래의 약 35%, 오프라인 매장 결제의 21%를 차지할 만큼 이미 주류 결제 수단으로 부상했다
[1]. 그러나 각국에서 편리하게 쓰이는 모바일 결제도 국경을 넘어서면 제약이 커진다. 자국에서는 카카오페이나 페이팔, 위챗페이 같은 지갑으로 간편결제가 가능하지만, 해외 온라인 쇼핑이나 여행지 오프라인 상점에서는 국제 신용카드나 별도의 환전·송금 절차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 잘 통하는 지갑도 해외에선 통하지 않는 단절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글로벌 결제 플랫폼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고, 마침내 2025년 7월 PayPal(페이팔)이 새로운 해법을 내놓았다. 페이팔은 전 세계 주요 디지털 지갑을 한데 연결하는 크로스보더 결제 플랫폼 “PayPal World”를 발표하며, 모바일 월렛의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번 글에서는 PayPal World의 구상과 역할을 살펴보고, 글로벌 월렛 상호운용 시대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글로벌 지갑 결제의 부상과 상호운용성의 필요성
핀테크 혁신으로 모바일 간편결제는 세계 곳곳에서 급성장했다. 중국의 위챗페이와 알리페이는 현금 없는 사회를 이끌었고, 인도의 UPI는 은행 계좌만 있으면 누구나 QR코드로 결제·송금할 수 있게 했다. 한국, 동남아, 유럽 등 각지에서도 국가별 간편결제 서비스가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렇게 국내 시장에 한정된 결제망들은 서로 단절된 섬처럼 운영되어, *국가 간 전자상거래*나 *해외 여행* 시에는 불편이 따랐다. 예컨대 인도의 UPI 사용자도 해외 웹사이트에서 결제하려면 비자·마스터카드 같은 카드망에 의존해야 하고, 중국의 위챗페이 사용자도 외국에서는 본인 지갑을 직접 쓸 수 없었다.
국경을 넘어서는 디지털 결제를 가로막는 요인은 통화와 결제망의 이질성이다. 각국은 저마다 통화와 지급결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 서로 연동되지 않았고, 환전 수수료나 해외카드 수수료 등 비용과 시간 지연도 문제였다. 국제 송금도 중개은행을 통한 며칠씩의 처리 시간과 높은 수수료가 일반적이었다. 글로벌 경제가 통합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결제 인프라의 비표준화로 인한 마찰은 여전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디지털 지갑 간 상호운용성 확보는 전 세계 금융 업계의 과제로 대두되었다. 각지에서 표준 QR코드 도입이나 네트워크 연계를 시도해왔지만, 글로벌 차원의 통합 플랫폼은 부재한 상황이었다.
PayPal World: 지갑 연결을 통한 초국경 결제 플랫폼
페이팔은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고자 PayPal World를 출범시켰다. 이는 전 세계 여러 국가별 결제 시스템과 디지털 월렛을 하나로 묶는 최초의 글로벌 플랫폼으로, 각 지역에서 압도적인 가입자 기반을 가진 파트너들이 참여하고 있다. 현재까지 공개된 출시 파트너만 살펴봐도 중국의 Tenpay Global(텐센트 위챗페이의 해외결제 플랫폼), 인도의 NPCI International(UPI 네트워크 운영사), 라틴아메리카의 Mercado Pago(메르카도 리브레의 핀테크 자회사), 그리고 페이팔 본연의 PayPal 및 Venmo 등이 망라된다. 이들만 합쳐도 전 세계 약 20억 명에 달하는 잠재 이용자를 포괄하는 규모다.
PayPal World는 기술적으로 중립적(technology-agnostic)인 개방형 플랫폼으로 설계되어, 초기 파트너들과 PayPal·Venmo 간 상호운용을 시작으로 앞으로 더 많은 지갑을 순차적으로 연결해 나갈 예정이다. PayPal World의 핵심 아이디어는 간단히 말해 “내가 쓰는 국내용 지갑을 그대로 가지고 전 세계에서 결제하고 송금하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소비자는 다음과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먼저, 해외 온·오프라인 가맹점에서 자국 지갑으로 직접 결제가 가능해진다. 수백만 개에 달하는 글로벌 가맹점에서 별도의 현지 지갑이나 카드 없이 자신의 모바일 월렛으로 곧바로 결제할 수 있다. 예컨대 중국을 방문한 PayPal 이용자가 현지 카페에서 위챗페이(Weixin Pay) QR코드를 스캔해 결제할 수 있고, 인도의 UPI 이용자가 미국 온라인 상점에서 PayPal 결제 버튼을 누르면 친숙한 UPI 옵션이 나타나 결제를 완료할 수 있다.
두번째는 현지 통화와 결제수단으로 결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해외 결제 시 자동으로 환전이 연계되어 현지 통화로 지불되며, 사용자는 자기 나라에서 쓰던 선호 지갑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 국경 간 P2P 송금 또한 간소화된다. 해외 친구나 가족에게 송금하는 절차가 크게 단순해진다. 예를 들어 미국의 Venmo 이용자가 독일의 친구에게 생일 돈을 보내고자 할 때, 상대방의 PayPal 계정에 바로 입금되도록 보낼 수 있어 국제 송금이 문자 메시지 보내기만큼 쉬워진다.
가맹점 입장에서도 PayPal World의 등장은 반가운 변화다. 전 세계의 다양한 결제수단을 한 번의 연동으로 받을 수 있게 되어, 추가 개발이나 계약 없이 20억 명에 육박하는 신규 고객 기반에 접근할 수 있다. 특히 젊고 디지털 친화적인 Venmo 이용자층까지 포용함으로써 매출 증대와 결제 선택권 확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PayPal World에 참여한 이후에는 새로운 지갑 파트너가 추가되더라도 별도 작업 없이 자동으로 결제가 활성화되므로, 기업 입장에서 결제 인프라 확장의 부담이 줄어드는 이점도 있다.
페이팔은 이러한 구상을 2025년 가을부터 현실화할 계획이다. 현재 파트너들과의 연동 개발을 마치고 순차적 서비스 개시에 나설 예정이며, 초기에는 PayPal 및 Venmo와 각 파트너 지갑 간 양방향 연동에 초점을 맞춘다. 예컨대 PayPal<->UPI, PayPal<->WeChat Pay, Venmo<->PayPal 간에 송금·결제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식이다. 특히 그간 별개로 운영되던 PayPal과 미국 P2P플랫폼 Venmo가 이번에 처음으로 상호운용되는데, 이를 통해 Venmo 사용자가 PayPal 전자상거래망에 참여하는 등 PayPal 생태계가 한층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
기술적으로도 PayPal World는 오픈 API, 클라우드 기반 멀티리전 아키텍처 등을 도입해 글로벌 트랜잭션에서도 지연을 최소화하고 높은 가용성을 보장하며, 안전성을 최우선으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또한 AI 에이전트와 연계한 대화형 쇼핑이나 스테이블코인 결제 같은 미래 기술까지 수용하도록 확장성을 갖춰, 향후 디지털 상거래 환경 변화에도 대비하고 있다.
주요 국가별 지갑 결제망과 상호운용 사례 비교
PayPal World가 지향하는 글로벌 상호운용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개념이 아니다. 여러 나라들이 저마다 국내 또는 지역 내 결제망 연결을 추진해 왔고, 그 성과들이 쌓여 오늘날 글로벌 연계를 논의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각 사례별 접근법을 표로 나타내 보면 아래와 같다.
플랫폼 / 지역 | 출범 시기 | 운영 주체 | 상호운용성 전략 및 특징 |
PayPal World (글로벌) | 2025년 (출시 예정) | 페이팔 (미국 핀테크 기업) | 전 세계 주요 지갑 연계 글로벌 플랫폼. 파트너 지갑(UPI·위챗페이·메르카도파고 등)과 PayPal·Venmo를 상호 연결하여 국경 간 양방향 결제 지원. 기술 중립적(open API) 구조로 추후 지갑 추가 용이. 약 20억 명 이용자 커버 목표. |
UPI (인도) | 2016년 | NPCI (인도 중앙결제기관) | 국가 단일 즉시결제망. 은행·핀테크 간 인터페이스 표준화로 국내 모든 지불 앱 상호운용 완비. 월 160억건 이상 거래 처리. 국제화 적극 추진 – 싱가포르 등 해외 실시간결제망과 연동, PayPal World 통해 글로벌 지갑 연결 시도. |
WeChat Pay (중국) | 2013년 | 텐센트 (민간 IT기업) | 민간 주도 모바일 지갑 생태계. 중국 내 위챗페이-알리페이 양강 구도로 10억+ 사용자 확보. 정부의 QR코드 표준화 정책으로 경쟁 서비스 간 호환성 증대 추세. 텐페이 글로벌을 통해 해외 지갑과 연계 (PayPal World 파트너) 및 외국인 해외카드 연결 지원 확대. |
Mercado Pago (LATAM) | 2003년 | 메르카도 리브레 (민간) | 라틴아메리카 범지역 결제 플랫폼. 자사 e커머스 기반으로 8개국 전개, MAU 6천만 명 규모. 주로 자사 생태계 내 통용되며 타 지갑과 연계 부족. PayPal World 참여로 글로벌 네트워크와의 상호운용 첫걸음. |
FedNow (미국) | 2023년 | 미국 연준 (중앙은행) | 국내 실시간 결제 인프라. 은행 계좌 기반 24/7 즉시이체망으로 1년 만에 900+ 기관 참여. ISO20022 표준으로 구축되어 향후 다른 국가 시스템과 기술적 인터페이스 가능성. 현재는 국내용으로, 디지털 월렛 간 직접 연동 기능은 없음. |
Wero (유럽) | 2024년 | EPI 연합 (유럽 은행컨소시엄) | 범유럽 통합 디지털 월렛. 독일·프랑스 등 기존 국가별 은행결제 앱을 단일 브랜드로 통합하여 역내 어디서나 동일 결제 구현. SEPA Instant 기반 계좌이체형 지갑으로 실시간 결제 지원. 2025~27년 온라인·오프라인 전 영역 확대 예정. 디지털 유로 등 공공 인프라와 연계 추진. |
인도와 유럽은 공공 주도 표준화를 통해 범용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중국과 미국은 민간 혁신이 시장을 열었으며, 라틴아메리카는 빅테크 플랫폼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차이가 있다. PayPal World는 이러한 다양한 로컬 네트워크를 잇는 글로벌 허브로 기능함으로써, 각 시스템의 강점을 결합하고 약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마치며 : 글로벌 상호운용성 시대의 의미
페이팔의 PayPal World 발표는 디지털 결제의 지형이 전환점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각국, 각 기업별로 폐쇄적으로 성장해온 결제 생태계가 이제 연결과 협력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글로벌 월렛 상호운용은 결제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를 가속시킬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소비자 편익의 극대화가 가능해진다. 국경을 초월한 지갑 연동은 소비자에게 “내 지갑 하나면 전세계 어디서나 결제 가능”이라는 심리적 안정감과 편의성을 제공한다. 마치 로밍 서비스로 전세계 어디서든 휴대전화를 쓰듯, 결제도 로컬 지갑의 글로벌 로밍이 구현되는 셈이다. 두번째는 사업자 간 경쟁과 협력 구도의 재편이다. PayPal World처럼 기존 거대 지갑들을 묶는 연합이 활성화되면, 각 플레이어는 경쟁자이면서도 한 플랫폼 안에서 협업 파트너가 되는 복합적 관계를 맺게 된다. 이는 비자·마스터카드 중심의 전통적 국제결제망에 대항마가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유럽의 Wero 출범은 미국 카드사 독점에 대한 도전으로 평가되고, 페이팔의 행보도 향후 카드 네트워크를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새로운 결제 패권을 형성할 잠재력을 지닌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기득권의 견제와 규제 장벽에 부딪힐 가능성도 있다. 각국의 외환관리나 데이터주권 이슈, 반독점 규제 등으로 인해 글로벌 결제 연동의 속도는 달라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포용적 금융(Inclusive finance)의 진전이다.
전 세계 수십억 명의 소비자와 중소상공인이 국경의 제약 없이 디지털 금융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 글로벌 차원의 금융포용이 한층 확대된다. 특히 개도국의 사용자도 자국의 모바일 결제를 통해 쉽게 해외 상품을 구매하거나 해외에서 소득을 송금받을 수 있다면 경제 활동의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 페이팔이 “모두를 포괄하는 글로벌 디지털 경제”를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하겠다. 금융의 세계화가 결제 단계에서 현실화되는 흥미로운 변곡점을 지켜보도록 하자.
[1] PYMNTS Report(25/7) : https://www.pymnts.com/study/how-the-world-does-digital-pocket-revolu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