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라이프가 스테이블코인 스타트업 '브릿지'를 인수한 이유
by 길진세(BC카드 AI Biz Lead)
들어가며
2024년 10월, 글로벌 결제 기업 스트라이프(Stripe)는 스테이블 코인 결제 인프라 스타트업 브릿지(Bridge)를 약 11억 달러(한화 약 1조 4천억 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블록체인 업계에서도 손꼽히는 사례로, 스트라이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수이다[1].
브릿지는 기업들이 손쉽게 스테이블 코인(가치가 달러에 고정된 암호화폐)을 결제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API 형태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이다. 브릿지의 API 코드를 자사 시스템에 몇 줄만 넣으면, 별도의 블록체인 인프라를 직접 구축하지 않아도 고객으로부터 USDC나 USDT 같은 스테이블 코인으로 대금을 받고 이를 법정화폐로 정산받는 것이 가능해진다[2].
스트라이프가 역대 최고가를 치르면서까지 브릿지를 인수한 이유는 무엇일까? 스트라이프 CEO 패트릭 콜리슨은 "스테이블 코인은 금융 서비스의 상온 초전도체와 같다"고 비유하며, "스테이블 코인 덕분에 전 세계 비즈니스가 향후 몇 년간 결제 속도, 범위(커버리지), 비용 면에서 큰 개선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결제망 혁신의 열쇠가 스테이블 코인에 있다고 보고, 스트라이프는 "세계 최고의 스테이블 코인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며 이 분야에 전략적으로 베팅한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스트라이프가 브릿지를 통해 어떤 전략을 준비 중인지와 그 의미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
스테이블 코인의 확장세
최근 몇 년간 스테이블 코인은 암호화폐 시장을 넘어 전 세계 결제와 금융 인프라의 핵심 요소로 급부상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규제당국은 스테이블 코인을 제도권에 편입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미국 의회는 스테이블 코인을 제도권으로 인정하고 규제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며, 조만간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는 달러화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미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는 "안정적인 규제 환경에서 스테이블 코인이 발달하면 다른 나라 국민들도 달러 기반 자산 수요를 늘리게 되어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강화할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3]. 미국은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스테이블 코인을 디지털 형태의 달러화로 활용함으로써 달러 헤게모니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다.
반면 개발도상국 등 자국 통화 신뢰도가 낮은 국가들로서는 스테이블 코인의 확산은 오히려 자국 법정화폐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진다.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국가들의 국민들은 가치가 급락하는 현지 통화 대신 미국 달러에 연동된 스테이블 코인을 사실상의 대안 통화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일상 거래에도 이용하고 있다. 이는 공식적인 달러화 승인 없이 '시장에서 자발적으로 진행되는 디지털 달러라이제이션(digital dollarization)'으로 볼 수 있다. 스테이블 코인이 규제 없이 세계 경제 전반에 퍼진다면 국가 통화와 경쟁하는 평행 통화 시스템을 만들어 각국의 통화 주권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이유이다. 실제로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 통화가치가 불안정한 나라에서 스테이블 코인 사용이 급증하자 각국 정부가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결제 수단으로서 스테이블 코인의 영향력은 빠르게 커지고 있다. 특히 해외송금 및 국제결제 분야에서 스테이블 코인 활용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기존 은행망을 통한 국제송금은 중개은행을 여러 단계 거치면서 평균 6% 이상의 높은 수수료와 수일의 처리시간이 소요되지만, 스테이블 코인을 이용하면 거의 실시간에 수수료도 몇십원 수준으로 송금이 가능하다. 트론이나 솔라나 같은 저비용 블록체인 위에서 이루어지는 스테이블 코인 전송은 건당 $0.001 미만의 수수료로 순식간에 결제가 완료된다.
이러한 속도와 비용 혁신 덕분에 업계에서는 스테이블 코인이 빠르고 저렴한 글로벌 송금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실제로 2023년 한 해에만 전 세계 스테이블 코인 거래액이 약 7조 달러에 달했고, PayPal과 같은 글로벌 핀테크 기업도 자체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해 국제 송금에 활용하기 시작하는 등 스테이블 코인이 실생활 결제 인프라로 자리잡는 추세이다[4].
스트라이프의 전략과 브릿지의 역할
스트라이프는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암호화폐 결제 사업을 재개하며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한때 2018년에 비트코인 결제 지원을 중단했던 스트라이프는, 2022년부터 다시 암호화폐 부문에 진출하더니 2024년 4월에는 "Crypto is back"을 선언하며 USDC 등 스테이블 코인 기반 결제 서비스를 재도입했다.
스트라이프는 USDC(미국 달러 연동 스테이블 코인)를 활용하여 자사 플랫폼에서 암호화폐 결제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우선 미국 내 일부 비즈니스 고객을 대상으로 시범 제공하기 시작했다.
스트라이프의 가이드 문서에 따르면 현재 이더리움, 솔라나, 폴리곤 네트워크를 통해 USDC 결제를 받고 즉시 달러로 정산하는 기능이 제공되고 있다. 즉, 고객이 메타마스크 같은 지갑으로 USDC를 보내 결제하면 스트라이프 상점주는 별도의 암호화폐 지갑이 없어도 자동으로 달러 매출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브릿지는 이러한 스트라이프의 스테이블 코인 결제 전략에서 핵심적인 백엔드 역할을 수행하는 인프라가 되었다.
스트라이프의 USDC 결제 기능 이면에는 브릿지의 기술이 자리하고 있다. 브릿지는 여러 통화와 스테이블 코인을 아우르는 범용 결제 처리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서, USDC는 물론 PayPal이 발행한 PYUSD나 USDT 같은 다양한 스테이블 코인을 기업들이 손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이 브릿지 API를 연동하면, 고객이 세계 어느 나라에서 어떤 스테이블 코인으로 결제를 보내든 브릿지가 이를 실시간으로 받아서 기업 계정에 미리 지정된 통화(달러 등)로 전환해 주는 것이다. 브릿지는 각 지역의 결제 파트너들과 연계되어 있어, 멕시코의 Bitso나 아프리카의 Yellow Card 같은 현지 업체를 통해 스테이블 코인을 현지 법정화폐로 출금하는 기능도 지원하고 있다.
스트라이프 입장에서는 안정적이고 확장성 있는 스테이블 코인 결제 인프라를 자체 보유함으로써, 앞으로 크립토 기반의 글로벌 결제 시장 본격 공략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스트라이프 CEO는 브릿지 인수 발표 당시 "스테이블 코인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속도와 비용 면에서 혁신적인 송금망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며, 브릿지 기술로 국경 간 머니무브먼트(money movement)를 한층 단순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5].
마치며: 전장을 넓히는 스테이블 코인
브릿지가 스트라이프 품에 안긴 이후, 스테이블 코인을 실물경제에 접목하려는 스트라이프의 행보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2025년 5월, 글로벌 카드사 비자(Visa)는 브릿지와 협업하여 스테이블 코인 연동 비자카드 프로그램을 라틴아메리카에서 출시한다고 발표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에콰도르, 멕시코, 페루, 칠레 등 6개국에서 새로운 카드가 발급될 예정이며, 카드 사용자들은 자신의 스테이블 코인 잔액으로 오프라인 가맹점에서 직접 결제를 할 수 있게 된다[6].
사용 방식은 일반 카드 결제와 거의 동일하지만, 결제 대금이 차감되는 계좌가 은행 계좌 대신 스테이블 코인 지갑이라는 점이 차이이다. 사용자가 USDC 연동 카드를 사용해 편의점에서 결제하면, 브릿지가 카드의 스테이블 코인 잔액에서 해당 금액을 즉시 차감한 뒤 가맹점에는 현지 통화로 결제대금을 정산해 준다. 이렇게 하면 소비자는 암호화폐를 쓰는 것을 체감하지 않고도 스테이블 코인의 혜택(가치 안정 및 낮은 수수료)을 누릴 수 있고, 가맹점도 별도의 암호화폐 수용 인프라 없이 기존 방식대로 대금을 받게 된다.
비자-브릿지 협업 카드의 출시는 스테이블 코인이 결제 수단으로 본격 확산되는 신호탄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자 최고제품책임자는 "그동안 파일럿 수준으로 실험해온 것을 이제 세계적 규모로 확대할 때라고 느꼈다"며, 스테이블 코인 기반 금융 서비스를 대중화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브릿지의 CEO 또한 "안정적인 코인을 일상 금융 툴에 통합해야 대규모 사용이 가능하다"면서, 기존 금융망과의 연동을 강조했다.
스트라이프가 브릿지를 인수한 것은 이런 흐름을 선점하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통화 불안으로 달러에 대한 수요가 높은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등 지역부터 비자 카드 프로그램이 시작된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스트라이프는 브릿지 인프라를 앞세워 경제 불안정 지역의 기업과 소비자들을 공략하고 글로벌 결제 성장 동력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법과 규제에 앞서 선제적으로 움직인 스트라이프의 전략이 성공할 수 있을지 지켜보도록 하자. “끝”.